일본어? 한국어?

팬티와 빤쓰 손현숙

지영 센세 2014. 12. 27. 11:08

팬티와 빤쓰

 

손현숙

 

외출을 할 때는 뱀이 허물을 벗듯

우선 빤쓰부터 벗어야 한다

고무줄이 약간 늘어나 불편하지만, 편안하지만,

그래서 빤쓰지만 땡땡이 물무늬 빤쓰

 

집구석용 푸르댕댕 빤쓰는 벗어버리고

레이스팬티로 갈아입어야 한다

앙증맞고 맛있는 꽃무늬팬티 두 다리에 살살 끼우면

약간 마음이 간지럽고 살이 나풀댄다

나는 다시 우아하고 예쁜 레이스공주

 

밖에서 느닷없이 교통사고라도 당한다면

세상에, 땡땡이 빤쓰인 채로 공개되면 어쩌나

비싼 쎄콤장치로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듯

유명 라펠라 팬티로 단단한 무장을 한다

 

오늘 바람이라도 살랑, 불라치면

혹시라도 치마가 팔랑, 뒤집힌다면

나 죽어도 꽃무늬 레이스로 들키고 싶다

 

 

 

아주 재미난 시다. 영어의 팬티 (Panty)가 일본으로 건너가면 빤스(ぱんつ,pantsu)가 된다. 같은 속옷이지만 <빤스>의 이미지가 다르고 <팬티> 이미지가 다른 것은 왜일까? 같은 사물에 대해 다른 이미지를 연상 시키는 말은 <팬티>와 <빤스>말고도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빠마>와<펌>,<아까징끼>와<요드딩크>,<뼁끼>와<페인트>같은 것들도 우리의 뇌리에 와 닿는 이미지는 사뭇 다르다.

 

일본 작가 다코와카코(田幸和歌子)는 <잡학사전>에서 일본인 최초로 서양식 여성 속옷인 ‘즈로즈’를 손에 넣은 사람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이라고 했다. 포루투칼 사람이 선물용으로 가지고 들어 온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이 이상한 여성 속옷을 구경만 했을 뿐 입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때까지 여자들은 고시마키(腰巻)라 해서 엉덩이에 긴 천을 둘렀는데 오늘날의 팬티와는 사뭇 다른 것으로 옷이라기보다는 아이들 기저귀 모양의 긴 천 끝에다 천을 여밀 수 있는 끈을 달아둔 것이었다. 반면 남자들은 국부에 ‘훈도시’를 찼다. 훈도시(褌)의 한자를 자세히 보면「衣」와 軍」으로 된 글자가 말해 주듯이 군사들이 입던 속옷이다. 예전에는 옷감이 귀해 전국시대(戦国時代)에는 전사자의 신분을 훈도시를 찼는지의 여부로 구분했다고 한다. 당시는 마(麻)가 주류였으나 에도시대에 들어 와서는 목면으로 대체 되었고 무사 외에 일반 서민들에게도 보급되었다. 2차대전 때까지 남자들의 속옷 역할을 했으나 패전 후 서양옷과 함께 팬티의 유입으로 급속히 착용자가 줄어들어 지금은 마츠리 등에서만 쓰인다.

 

일본에서 오늘날 입는 팬티가 선을 보인 것은 1956년으로 당시 1주일을 의미하는 ‘7색팬티’를 만들어 팔았는데 색색깔로 골라 입을 수 있어 여성들 사이에 일대 선풍을 일으켰다. 일본위키피디어에 따르면 1970년대까지는 여성들이 입는 것을 판티(팬티발음을 못한다)라 했고 1980년대 후반에는 남녀노소 모두 ‘빤츠’라 불리다가 이후 여성용과 유아용만 ‘쇼츠’라고 불리는 등 우리와 달리 팬티 명칭이 복잡하다. 정리하면 우리가 속곳-사리마다-빤스-팬티라 불린데 반해 일본은 여성의 경우 고시마키-판티-빤츠-쇼츠, 남성의 경우 훈도시-사루마다-빤츠 식이다. 한국인들이 '빤스' 이전에 부르던 '사리마다'란 것이 있는데 이는 남자 속옷을 말한다. 사루마다(さるまた,sarumata)는 한자로 ‘猿股’ 또는 ‘申又’라고 쓰는데 우리나라에서 예전에 어른들이 ‘사리마다’라고 부르던 그것이다. 한국인들이 ‘사리마다’라고 부르던 속옷의 유래를 어떤 이들은 설명하기를 미국인을 처음 본 일본인들이 원숭이(사루)처럼 머리털이 노랗고 몸에 털이 많이 난 것을 보고 그들이 입는 자루 같은 옷이라 해서 사루마다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근거가 없다고 일축하기 보다는 서양 사람들을 원숭이로 볼 수는 있겠다 싶다. 다만 ‘사루’는 원숭이를 뜻하지만 ‘마타 (股/胯/叉)’는 가랑이를 뜻하는 것으로 자루와는 거리가 있다.

 

사리마다, 빤스, 팬티의 유래를 살펴보고 있자니 우리말의 속옷은 없나 싶은데 조금만 살피면 우리 것도 잔뜩 있다. 전통사회에서 한국여성들은 치마 속에 입는 옷으로 속속곳-속곳-고쟁이-단속곳을 입어야 비로소 치마를 입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처럼 달랑 팬티하나 입는 것에 비해 속옷 하나에도 켜켜이 격식을 차릴 줄 알았다. ‘고쟁이를 열두 벌 입어도 보일 것은 다 보인다’는 속담이 있을 만큼 속옷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우리가 언제부터 속곳을 벗어 던지고 ‘빤스’를 들여다 입기 시작한 것일까? 일제강점기다. 살벌한 식민지 정책 하에서 신음해야 했지만 속옷까지 검열하지는 않았을 텐데 어찌 속곳을 버리고 빤스를 입었을까? 그리고 지금은 그 빤스도 벗어버리고 꽃무늬 레이스팬티를 좋아하는 세상이니...

 

 

일본식 외래어 발음 <빤스> 이야기를 하다 예까지 왔다. 다시 원 위치 하자. <표준국어대사전>에 보면 ‘빤쓰(<일>pansu): 팬티’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다음국어사전>에는‘속잠방이’ 또는 ‘팬티’로 순화하라고 쓰여 있다. 빤스나 팬티나 모두 버리고 속잠방이 하거나 속곳이란 우리말을 써도 좋을 텐데, 겨우 ‘빤쓰’를 ‘팬티’로 발음하란다. 그나마도 국립국어원 사전은 아무런 의견도 없이 빤스=팬티란다. 속옷 하나라도 우리말을 쓰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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