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좋은 글귀

봄이 오면 나는 - 이해인

지영 센세 2013. 3. 1. 11:20

 


 

이 오면 나는 - 이해인

 

이 오면 나는
활짝 피어나기 전에

 

조금씩 고운 기침을 하는 꽃나무들 옆에서
덩달아 앓이를 하고 싶다.


살아 있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피워 올리는 꽃나무와 함께
나도 기쁨의 잔기침을 하며
조용히 깨어나고 싶다.


이 오면 나는
햇볕이 잘 드는 안뜰에
작은 꽃밭을 일구어 꽃씨를 뿌리고 싶다.


손에 쥐면 금방 날아갈 듯한
가벼운 꽃씨들을 조심스레 다루면서
흙냄새 가득한 꽃밭에 고운 마음으로
고운 꽃씨를 뿌리고 싶다.


이 오면 나는
매일 새소리를 듣고 싶다.


산에서, 바다에서, 정원에서
고운 목청 돋우는 새들의 지저귐으로
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나는 새들의 이야기를 해독해서
밝고 맑은 를 쓰는 새의 인이 되고 싶다.


바쁘고 힘든 삶의 무게에도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의 은빛 날개 하나를
내 영혼에 달아주고 싶다.


이 오면 조금은 들뜨게 되는
마음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더욱 기쁘고 명랑하게 노래하는
새가 되고 싶다.


이 오면 나는
이슬비를 맞고 싶다.
어릴 적에 항상 우산을 함께
쓰고 다니던 소꼽동무를 불러내어
나란이 비를 맞으며 비 같은
이야기를 속삭이고 싶다.


꽃과 나무에 생기를 더해주고
아기의 미소처럼 사랑스럽게
내 마음에 내리는 비,
누가 내게 에 낳은 여자 아이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면 서슴없이
'비' '단비'라고 하고 싶다.


이 오면 나는
풀향기 가득한 잔디밭에서
어린 절 즐겨 부르던 동요를 부르며
흰구름과 나비를 바라보는 아이가 되고 싶다.


함께 산나물을 캐러 다니던
동무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고,
친하면서도 가끔은 꽃샘바람 같은
질투의 눈길을 보내 오던
소녀절의 친구들도 보고 싶다.


이 오면 나는
우체국에 가서 새 우표를 사고
답장을 미루어 둔 친구에게
다만 몇 줄이라도 진달래빛 사연을
적어 보내고 싶다.


이 오면 나는
모양이 예쁜 바구니를 모으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솔방울, 도토리,
조가비, 리본, 읽다가 만 책,
바구니에 담을 꽃과 사탕과 부활달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선물들을
정성껏 준비하며
바쁘고도 기쁜 새을 맞고 싶다.


사계절이 다 좋지만
에는 꽃들이 너무 많아 어지럼증이 나고
마음이 모아지지 않아
힘들다고 말했던 나도 이젠 갈수록
좋아지고 나이를 먹어도
첫사랑에 눈뜬 소녀처럼 가슴이 설렌다.


이 오면 나는
물방울무늬의 옆치마를 입고 싶다.


유리창을 맑게 닦아
하늘과 나무가 잘 보이게 하고
또 하나의 창문을 마음에 달고 싶다.
먼지를 털어낸 나의 창가엔
내가 좋아하는 화가가 그린 꽃밭,
구름 연못을 걸어 두고,
구석진 자리 한곳에는 앙증스런 꽃삽도
한 개 걸어 두었다가 꽃밭을
손질할 때 들고 나가야겠다.


조그만 꽃삽을 들고
꽃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아름다운 음성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나는 멀리 나들이를 떠나지 않고서도
행복한 꽃 마음의 여인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의 여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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