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로 돌아가자
- 라캉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의식 중심의 주체철학을 세웠다. 그 이후로 근대철학은 바로 이 사유(생각)와 존재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사유의 한계를 규명하고자 했던 칸트나 사유를 역사화하고자 했던 헤겔이 뒤를 이었다. 의식 중심의 주체철학이 굳게 뿌리는 내리는 듯했다.
라캉은 데카르트의 철학적 선언을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그는 말한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나는 존재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근대철학의 존재와 사유의 일치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된다. 오히려 라캉은 존재와 사유의 불일치를 통하여 이 세상을 진단하고자 한다.
현대를 사는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그 자리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주체의 생성과 활동을 새롭게 모색하는 자리에 라캉이 있다.
다사다난한 정신분석학자
자끄 라캉(Jacques Lacan)은 1901년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리의과대학에서 의학과 정신병 치료학을 연구하였으며, 1932년 「편집증적 정신병과 인성의 관계」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박사학위를 얻었다. 그 후 그는 <파리정신분석학회>에 가입하여 열성적인 회원활동을 펼친다. 한편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거울단계」에 대한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독창적인 이론의 출발을 시작한다.
제2차 대전 당시 군용병원에 근무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언어학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 <파리정신분석학회>의 전통적인 정신분석학에 대하여 비판하고 탈퇴한 후 새로운 학풍을 지닌 <프랑스 정신분석학회>에 가입한다. 그후 그는 <학회>에서 공개 세미나를 개최하여 자신의 이론을 발표하였으며, 이 세미나는 26년 간이나 지속된다. 이 세미나를 통하여 정신분석학과 언어학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그리하여 53년 그의 주요 논문 중 하나인 「정신분석학에서 언어의 기능」을 발표한다.
이후 라캉은 욕망을 합리적으로 극복하고 정상인을 만드는데 목적을 둔 자아심리학자들의 견해에 대하여 반대한다. 한편 그 만의 독특한 업무처리와 교습방법으로 인하여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63년에 축출당한다. 이제 라캉은 자신의 연구소인 <파리 프로이트 학교>를 설립하고 의사뿐만 아니라 철학자, 인류학자, 언어학자, 수학자, 비평가들과 넓은 관계를 갖는다. 66년 그의 저서 에크리(Ecrit)가 발표되면서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이목을 받는다.
68년 프랑스 전역에서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시위가 벌어질 때, 라캉은 이들의 저항운동을 지지한다. 한편 1980년 라캉이 독단적으로 <파리 프로이트 학교>를 해산하고 <프로이트적 주장>을 설립하자, 이로 인하여 많은 친우들과 사이가 벌어지고 법정투쟁의 양상으로까지 확산된다. 말년에 그는 이러한 여러 문제로 고생을 하게 되지만, 그가 남겨놓은 연구성과는 이후 정신분석학뿐만 아니라 철학, 사회학, 언어학, 문학 등의 방대한 영역에서 연구되고 계승된다. 그는 80의 나이로 1981년 사망한다.
프로이트로 돌아가자
조직에 대한 비판과 탈퇴, 새로운 조직 가입, 조직에서 축출당함, 조직 창설 그리고 독단적 해산과 새로운 조직 설립.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천로역정에 비유될 수 있는 다사다난한 삶을 살게 했던 것일까. 이유가 여러 가지 이겠지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그의 일관된 정신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정신분석학계는 정신분석적 방법을 통하여 환자를 치료함으로써 환자로 하여금 정상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목표라고 여겨왔다. 따라서 의사는 당연히
정상인이자 치료자며 교사요, 환자는 비정상인이자 치료받아야할 대상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미국의 자아심리학자들에게서 대표적으로 발견되는데, 이 입장에 따르면 자아/무의식 중에서 중심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자아(ego)>가 된다. 라캉은 이러한 자아심리학적 태도가 프로이트에 대한 중대한 오류와 왜곡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의 핵심은 자아(의식)에서 무의식으로 전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그의 구호는 망각된 프로이트가 아니라 왜곡된 프로이트에서 원래의 프로이트의 정신을 찾으려는 전투적 선언이 된다. 하지만 - 뒤에서 다루어지겠지만 - 그가 돌아가려는 프로이트는 초자아/자아/이드로 삼분립되는 후기 프로이트가 아니라 의식/무의식으로 양분되는 초기 프로이트이며, 그것도 구조 언어학의 성과를 적용한 ‘라캉적’ 프로이트이다. 따라서 우리는 프로이트와는 다른 프로이트, 라캉이 재해석한 프로이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우리는 구조주의를 통하여 인간의 사고가 무의식적 구조에 의하여 구성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고를 규정하는 무의식은 어떻게 생성되는 것일까? 라캉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석하는 가운데서 이를 설명하려 하였다. 우선 그 설명과정을 따라가 보자.
아이는 태어나면서 어머니와 자신을 하나라고 여긴다. 따라서 아이는 자신을 어머니와 동일시하며,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인 남근(男根:phallus)을 자신과 일치시킨다. 물론 이러한 동일시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지만. 따라서 이 때 아이는 <상상계> 속에 속해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적인 관계는 유지될 수 없다. 그 관계 속에 아버지가 등장한다. 이제 어머니-아이의 상상적 관계는 어머니-아이-아버지의 관계로 현실화된다. 그로써 더 이상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인 남근이 자신이 아님을 아이는 알게 되며, 자신이 남근을 욕망했다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만약에 아이가 남근임을 계속 고집할 경우 거세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받는다. 따라서 아이는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상징적인 거세>를 당하게 된다. 이를 라캉은 <일차적 억압>이라고 말했다.
라캉은 인간 주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으며,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사실을 통하여 무의식의 형성과정을 설명하려 하였던 것이다. 좀 더 가보자.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제 아이는 아버지를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아버지의 욕망을 일치시키려한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아이에게 어떠한 존재인가?
라캉은 아버지를 생물학적인 존재로 설명하지 않고 ‘아버지’라는 기표로써 설명하였다. 이 때의 아버지는 사회적인 법의 상징이며, 문화적인 질서의 상징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아이가 상상계 속에서 가졌던 관계를 ‘안돼(non!)’라고 외치며 금지하고, 아이를 상징적인 질서의 세계로 진입시킨다. 라캉은 이 때의 아버지를 생물학적 아버지와 구분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이름(nom-du-pe`re)>라 하였다.
아이는 <상상계>를 떠나 <상징계>로 돌입한다. 상징계는 ‘아버지의 이름(nom)’이 지배하는 세계, 즉 금지(non)의 세계이며, 법의 세계이고, 질서의 세계이다. (불어에서 이름(nom)과 금지(non)는 발음이 같다.)
라캉은 인간의 주체 구성단계를 이처럼 <상상계>와 <상징계>로 구분하였다. 한편 이러한 단계는 아이가 거울을 보면서 거울 속의 자신과 원래의 자신을 동일시하는 <거울단계>와 신화 속의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의 분열을 경험하는 <오이디푸스단계>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타자의 욕망
아이가 상징계 속에 돌입한다고 해서 자신의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상징적인 거세를 당했지만, 이 욕망의 결핍을 채우고자 끊임없이 다른 욕망의 대상을 찾는다. 아이는 자신을 인정받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한다. 어머니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어머니가 원하는 행동을 하려한다. 착한 아이, 공부 잘하는 아이, 말 잘 듣는 아이가 됨으로써 어머니의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하지만 이 욕망은 원래의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일차적인 억압을 통하여 생겨난 결핍을 채우려는 <결핍된 욕망>이요, 남에게 인정하기 위한 <인정욕망>이고, 그런 의미에서 <타자의 욕망에 대한 욕망>이요 궁극적으로는 <타자의 욕망>이다.
이 욕망은 상징적 질서 속에서 채우려는 욕망이기에 결코 근원적 결핍을 채울 수 없다. 욕망은 끊임없이 결핍을 채우기 위하여 자리를 옮기지만 머물 대상을 찾지 못한다. 욕망은 끝없이 전개된다. 예를 들어 어머니에서 여자 친구로, 여자 친구에서 애인으로, 애인에서 아내로, 아내에서 자식으로. 라캉은 이를 <욕망의 환유>라고 말하였다.
언어학적 정신분석
라캉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설명하면서 주체의 형성과정을 설명하였다. 물론 이 과정은 의식적인 과정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과정이다. 이처럼 주체의 형성과정은 바로 무의식이 작동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전까지 설명불가능한 영역으로 치부되어온 무의식 역시 일련의 방식을 통하여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물음의 지점이 바로 정신분석학과 구조주의 언어학이 만나는 장소이다.
라캉은 “무의식 역시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며, 때문에 무의식 역시 언어적인 구조 속에서 작동한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라캉은 언어야말로 무의식의 존재조건이며, 언어가 없다면 무의식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어떻게 가능한가?
라캉은 무의식을 최초로 분석한 프로이트와 구조언어학의 유사성을 들어 이를 설명한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꿈은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다”라고 말하고, 꿈의 작동원리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잠재몽은 현재몽으로 드러나는 과정에서 응축과 치환을 수행한다. 예를 들어 한 여인의 형상에 어머니, 누이, 애인 등 유사성을 갖는 여러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응축이며, 남자의 성기 대신 그에 인접한 뾰족한 막대기나 바위 등으로 대체되는 것이 치환이다. 그런데 이 응축과 치환과정은 바로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나타나는 계열관계(은유)와 연쇄관계(환유)에 상응한다. 즉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분석을 통하여 이미 구조언어학을 예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음 도표를 참조하자.
프로이트 |
응축 |
치환 |
소쉬르 |
계열관계 |
연쇄관계 |
야콥슨 |
은유(유사성) |
환유(인접성) |
이러한 상응관계에서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은 무의식 역시 은유와 환유라는 언어학적 능력이 없다면 자신의 작업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언어야말로 무의식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바로 이러한 발견이 정신분석학과 언어학이 만나는 지점이며, 이로 인해 정신분석학의 혁명적 전환이 이루어진다.
미끄러지는 기표
따라서 이제 우리는 구조언어학적 방법을 통하여 무의식을 잘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구조언어학에 의하면 언어는 기표들에 의해 구조화된 질서이다. 한편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구조언어학의 창시자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가 비록 자의적인 관계이지만, 우리는 기표를 통하여 기의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라캉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라캉은 무의식이 기표를 통하여 드러나지만 그 과정에서 은유와 치환 등의 작업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기의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를 라캉은 S/s라고 표시하였다. ‘S’는 기표를 의미하며, ‘s’는 기의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기표와 기의는 건널 수 없는 장벽인 ‘/(bar)’를 사이에 두고 있다. 따라서 기표는 기의에 이르기 위하여 무수히 많은 작업을 수행하지만 결코 기의에 이르지 못하고 수많은 기표들 사이로 옮겨 다닐 뿐이다. 라캉은 이를 <기표의 미끄러짐>이라고 말한다.
분열된 주체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상징계>와 <상상계>에 대한 관계로 바꾸어볼 수 있다.
언어가 기표들에 의해 구조화된 질서라고 했을 때, 기표를 사용한다는 것은 <상징계>, 즉 상징적인 질서 속으로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기표가 기의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기표를 사용하자마자 자신의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즉 원래의 자신과 기표로 표현된 자신 사이의 벽을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기표를 사용하는 것은 불가분 분열을 발생시키는 억압적인 상황을 연출하게 된다. 심리분석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상징적인 거세>에 해당되는 이러한 상황을 라캉은 이를 <일차적 억압>이라고 말했다.
바로 이 분열의 과정, 억압의 과정이 주체 형성의 과정이며, 무의식이 주체 내부에 자리잡는 과정이다. 이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은 결코 원래의 자신에 이르지 못한다. 대신 인간은 이 소외를 통해서만 주체를 형성할 수 있다.
타자의 담론
이제 인간의 자리가 확인되는 듯하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인간은 기표 속에서 자신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언어는 인간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즉 기표는 타자(l'Autre)다. <상징계>의 질서다. 무의식은 바로 이 원래의 인간과 기표 사이에서 형성된다. 그런데 무의식 역시 언어를 전제로 구조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언어 속에 있다. “무의식은 타자 속에서 말한다.” 다시 말해;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discours de l'Autre)이다.”
언어적 구조 속에서 형성된 무의식은 나의 욕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전달하며, 따라서 나는 항상 결핍을 경험한다. 존재의 결핍(manque-a`-e^tre)!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그것은 타자가 지정해준 자리이다. 나는 나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가? 그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인간은 누구나 상징적 질서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드러냄조차도 언제나 불완전하다. 나는 미끄러진다. 한 곳에 머물 수 없다.
지형변화
이제 처음에 인용했던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나는 존재한다”는 라캉의 말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의 담론 속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 결코 자신의 욕망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인간 존재!
라캉의 철학은 철학사에 커다란 지형변화를 초래한다. 라캉의 철학은 이전의 많은 철학적 논의를 부정한다. 라캉의 사고에 따르면, 주체와 사유의 일치는 불가능하다. 아니 주체적 사고라는 .말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을 통하여 해방을 꾀했던 마르쿠제나, 하버마스의 ‘이성의 기획’에 따른 모던의 옹호는 허구가 된다.
한편 이 사고의 혁명적 전환은 이후 많은 철학자들을 통하여 논의되고 증폭· 수정된다. 바로 뒤에 등장하는 알뛰세, 푸코, 들뢰즈 등의 철학자들은 라캉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는다.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알뛰세는 라캉의 담론개념을 사회철학에 적용하면서 이데올로기론을 전개하고, 푸코는 라캉의 ‘타자’개념을 역전시킨다. (라캉에게 ‘타자’란 상징계를 지배하는 질서임에 반해, 푸코의 ‘타자’는 이 질서로부터 소외되고 배제된 영역을 의미한다.) 들뢰즈는 라캉이 인간의 욕망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가족 삼각형 관계에 가두어 둠으로써 결국 보수주의로 귀결되며, 욕망의 진정한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강하게 비판하게 된다.
'센세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유, 환유, 기표, 기의 (0) | 2016.04.19 |
---|---|
은유와 환유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 - 자크 라캉)| (0) | 2016.04.19 |
북촌 산책길에 塀の上の犬 (0) | 2016.04.03 |
可愛い (0) | 2016.03.07 |
2월 16일 특강 (0) | 2016.02.10 |